굼벵이처럼... 지렁이처럼
- Posted at 2008/09/11 11:47
- Filed under 살면서..
친구에게
친구야
어제는 지리산에 갔었다.
언제나 그렀듯이 그 산은 말없이 나를 맞아 주었어.
남녘땅에서 가장 넓은 치마를 드리우고 넉넉하게
역사를 인간을 시대를 품어주던 그 품은
여전히 어린 자식을 품어주는 어머니 젖가슴이었어.
나무가 숲의 형편을 모르듯
물줄기는 나무의 목마름을 모른다.
산은 그냥 거기에 있고 나무가 모여 숲이 되고
그 숲에 풀벌레가 모여들듯
우리네 인간들도 살길을 찾아 떠난다.
친구야
머리가 있어도 현재를 바꿀 묘안이 없어.......
이마를 땅에 끌며 굼벵이처럼 지렁이처럼
그렇게 이마를 지렛대삼아 지리산을 내려왔다면
폭염이 아직 가시지 않은 지리산 치맛자락을 질질 끌며
지리산을 훼훼돌아 내려왔다면 너는 믿겠니.
친구야
누구를 한없이 사랑하는 것은 힘든 거야.
그만큼이나 누구를 원없이 미워한다는 것도 힘들지.
그래서 입이 있어도 혀가 있어도 말하기 어려운 거야.
심장의 고동이 아스팔트위에서 할딱할딱 멈추려 해도
가슴살 헤지더라도 그렇게 굼벵이처럼 지렁이처럼 가는 거야.
봄날 걸어서 가든 수레를 끌고 가든 자동차를 타고 가든
혼자서 가든 여럿이 가든 꽃가마 타고 나팔 불며 가든
아니면 엄동설한 허기진 배를 쥐고 활 들고 총 들고 지리산을 넘었던
그 길은 여전히 그 길이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다 한 핏줄 조상과 후손이야.
친구야
두 다리 멀쩡해도 걸어가지 않고 기어가는 사람들이 있단다.
아니 세 번 수술로 무릎 팍 물렁뼈가 없어도 기어가는 사람이 있어
다리가 있어도 걸을 수 없고 두 손이 있어도 무엇을 잡을 수가 없어
굼벵이처럼 지렁이처럼 한반도의 가장 밑바닥 땅을 가슴살 헤지며
이마에 돌멩이를 찍으며 지리산에서 계룡산까지 몸뚱이로 걸어서 간데.
친구야
그거 아니
한사람은 천주교 신부이고 한사람은 불교 스님이야
지리산에서 이념으로 죽고 죽이고 할 때도 종교는 있었어.
교회에 가면 교회에 나오라 하고 절에 가면 절에 나오래
천당과 지옥이 믿음의 차이가 아니라 종교의 선택에 있다고 하면
너는 그것을 믿겠니? 친구야.
친구야
지리산은 5천년동안 아군 편 적군 편으로 전쟁을 치룬 적이 있어
그러나 말이다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해봐
지리산은 한 번도 내편 네편 이었던 적이 없어
서로 피 흘려 싸우면 그 피를 받아 주었고 쫓기는 사람을 숨겨주었고
봄에 싹을 틔우고 가을이 되면 울긋불긋 풍성한 양식을 주었어.
친구야
참 힘들더라.
이마를 땅에 찍고 오장육부가 지열에 통닭구이처럼 비틀어지는
할딱거리는 오체투지 그 몸뚱이를 쳐다보는 지리산이 참 힘들더라.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종교와 종교가 손잡고 울고 있는지
시대가 지났어도 인간이 쳐놓은 욕망의 그물에 걸려
할딱거리는 육신의 물고기를 뜬 눈으로 지켜보는 것이....
친구야
낮이 지고 밤이 세상을 지배할 무렵
속세를 떠나 지리산으로 간 사람들 반대편으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한양 땅으로 돌아왔어.
속세의 땅 한가운데 섬처럼 떠 있는 조계사에서 웅성웅성 사람들이 모였어
누가 칼로 세 사람이나 찔렀다고 생명이 위태롭단다.
친구야
한 사람의 생명은 전체 세상이고 우주라며
한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그 눈을 감으면 세상은 사라진다며
생명을 위해 생명을 버리는 사람도 있고
순간을 위해 역사를 배신하는 사람들도 많아
너도 한번 가서 느껴봐
굼벵이처럼 지렁이처럼 몸뚱이로 기어서 가는 것이
얼마나 인간이 보잘 것 없고 얼마나 인간이 위대한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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